요즘도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예전에 복사기가 보급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먹지' 라는게 있었습니다. 종이의 뒷면에 인쇄용 먹같은 걸 묻힌 것인데, 그래서 종이 사이에 대고 눌러쓰면 뒷장에 먹지 때문에 다음 장도 똑같은 글자로 쓰일 수 있었죠. 복사기 없이 사본이 여럿 필요할 때는 먹지를 빈 종이에 여러장 번갈아대고 압력으로 글을 썼습니다. 특히 구속된 상태에서 법정에 제출할 반성문 등을 작성할 때는, 당연히 복사기를 사용할 수도 없고, 인쇄된 반성문은 너무 눈에 띄니, 그런 방식으로 작성되었었죠. 정갈하게 또박또박 쓰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형벌을 대신하는 퍼포먼스의 일종으로 '깜지' 라고 해서 빽뺵하게 쓰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그 방식은 우리나라 교육현장에 들어와, 교사가 학생들에게 주는 벌로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영단어나 암기과목을 빽빽하게 쓰는 방식은 지식습득으로도, 훈육의 수단으로 유용했죠.
1920년대 미국 영토 내 석유채굴권과 그 소유한 원주민 인디언들, 그리고 그걸 약탈하는 백인 범죄자들의 유명한 사건인 '오세이지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영화화한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2023년 신작, <플라워 킬링 문>은 마치 먹지를 이용해 작성된 깜지의 장황하고 빽빽한 반성문을 보는 듯 했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과 연출, 어디선가 본 듯한 연기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이 반성문은 필체도 내용도 훌륭합니다. 과거의 미국 백인남성들이 벌인 짓에 대한 반성과 고백,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에서 봤던 멋진 연출들, 로버트 드니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여전한 명연기는 너무 훌륭하지만 진부했습니다. 캐릭터가 그런 것이긴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멍청한 고구마 캐릭터 연기를 3시간 30분이나 봐야하는건, 그가 너무 훌륭한 배우라서 더더욱 먹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과하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반성문은 보통 이렇게 끝납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런 짓을 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아니라 직접 나레이션을 하는 마지막 연출은 독특하긴 했지만,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같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의 작품들은 또 다른 깜지가 될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