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곳의 5층에는 주변 초등학생들의 코 묻은 돈이 오가는, 지어진 지 30여년이 되어 가는 상가처럼 초라하게 낡아가는 문방구가 있습니다. 가끔 아이들의 준비물을 위해 가게에 들어서면 보통은 오래된 장난감들과 학용품들에 묻혀 머리가 온통 먼지로 새하얀 아저씨가 반기는데, 가끔은 그 아내인 듯한 분이 계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인 분의 차림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 옆 화장품 가게의 광고지 속 여인과 비교해도 월등히 짙은 화장에, 화려하면서도 도심의 높은 빌딩 속 회사의 사무직을 연상케 하는 옷차림, 그러니까 가게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싸구려 장난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가끔, 부부가 함께 있을 때 흘려 듣는 아저씨를 힐난하는 아내분의 목소리는, 아저씨에 대해 어떤 동정심을 일으킵니다.
같은 층에는, 도저히 옷가게라고 할 수 없는- 옷은 바닥이며 의자며 탁자에 그저 빨래거리처럼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한 쪽의 스팀 다리미 받침대(로 여겨지는)에는 다리미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옷이 그저 걸어 둔 대로 쌓인 가게가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가 옷가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천장에 달아 놓은 작은 간판과, 그 곳 주인의 차림새입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장성한 손녀가 있을 만큼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늘 ‘젊은‘ 옷을 입습니다. 목 깃은 세우고, 화려한 색의 뿔테 안경에 요란한 색의 농구화를 신고 출근하시는데, 출근하면 곧 친구들이 우르르 가게로 들어가 밤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 삼매경입니다. 대부분은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인데, 워낙 또박또박 쉰 소리로 크게 말씀하셔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밖에 없는데, 당연(?)히도 소싯적의 ’어마어마‘했던 삶과 지금의 ‘막대한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곳에 일터가 있는 나는, 매일 만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약점 잡히기 싫은 나머지, 머리는 까맣게 염색하고, 아내가 고른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20살이라고 허풍을 놓으며 세상 살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겁을 주고 있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쌓인 집안일에 피곤과 우울로 찌든 그녀를 받아 내느라 초라해 지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너희들이 나아갈 세상에 대한 지혜를 꿰찬 표정으로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이 곳 낡은 상가의 눈 닿는 곳마다 자기기만이 넘쳐 납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모습이 가소롭기 보다는, 낡은 건물의 수리된 엘리베이터만큼이나 애처롭습니다. 삶의 의지란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러나 외면하고 싶은 지금의 ’나‘에게서 눈을 돌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듯, 그것이 아니기에 더욱 나이고 싶은 무언가가 된 듯 짐짓 애쓰는, 의식의 자기기만에 다름 아닌 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들도 나와 같이, 기만의 낮을 보내고 피로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면, 고독 속에서 다시 원래의 자신을 만나는 긴 밤이 기다릴 거기에, 그들이 애닯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이 있길.
슈베르트, ’리타나이‘
제라르 수제, 달튼 볼드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