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비워야 할 날짜를 5일 남기고 계약이 틀어지는 바람에 초등학생인 아이 둘과 살 집을 서둘러 구했으나, 남편은 본가에서 어머니와 산 지 오래, 이사를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던 여인은, 이사한 지 일주일만에 겨우 사람 누울 정도로 정리했더니 갑작스레 올라온 남편의 잔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습니다. 큰 아이는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부모의 다툼, 그리고 언젠가부터 거의 함께 살지 않게 된 아버지의 부재로 말 수가 급격히 즐어들었고 비만까지 찾아와, 여인은 무던한 둘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매일 큰 아이의 심리 치료를 위해 이곳 저곳 발품을 팔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늘 웃고 친절합니다.
날 때부터 지나치게 작았던 둘째가 커가며 유난히 잠을 못자는 듯 하더니 어느 밤부터 발작하듯 온 몸을 떨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눈도 뜬 상태여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애써보았지만 여전히 원인을 알 수 없던 여인은, 시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잔소리에 어느 날부터 삼킨 것이 하나도 소화되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편과의 이혼을 매일 밤 고민하였지만 틱까지 생기는 둘째의 모습은,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어머니께 그간 쌓인 말을 쏟아 부어 연을 끊을 결심이 서게 하였고, 이 후 시가댁을 떠나 기댈 곳 하나 없는 서울로 무작정 떠나 온 여인은 생계를 위한 학위 취득으로 다시 소화 불량이 심각해 졌습니다.
스스로도 저주하는 타고난 성정 탓에 친정으로부터도, 시댁으로부터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데다, 경제적으로 의지가 되지 않는 남편 탓에 일을 잠시도 쉬지 못하며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는데, 가족과의 단절이 본인 탓이라는 죄의식까지 겹쳐 우울증을 호소하는 아내가, 첫째의 친구 엄마들을 만나고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측은지심에 그녀들을 위해 눈물을 글썽이며 쏟아 놓은 이야기.
오늘, 아내가 첫째만 데리고 첫째의 친구들과 엄마들을 만나러 간 동안, 둘째를 데리고 진눈깨비 내리는 동물원도 가고, 사람 북적이는 실내 놀이터도 가고, 순댓국도 호호 불며 먹고, 동네 개천 옆 산책로를 깔깔 대며 뛰어 다니며 종일 데리고 다녔더니 녹초가 되었습니다. 아빠가 그러던가 말던가 집에 들어온 둘째는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다 죽어 가는 아빠를 붙들고는 오늘 하루를 복기하며 종알대다가 어느 새 품에 안겨 잠이 듭니다.
잔인하기만 한 것 같은 세상이지만, 세속의 법들을 초월하는 어떤 순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고통은 아랑곳 없이 나 아닌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성스럽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순간들.
브루크너 교향곡 8번, 3악장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게반트하우스 라이프찌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