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빛이 사라지며 가장 슬픈 일은 신체가 쇠약해 진다는 겁니다. 의식의 그릇인 신체가 삐걱대는데, 의식이 온전할 리 없습니다. 온전하지 않은 의식은 일상의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여 가치로운 일조차 권태로워 집니다.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즐거움은 어느 새 매일 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되버립니다. 아이를 보내고, 집안을 정리하고, 밥을 씹고, 설거지 하고, 일 하러 가고. ‘아, 나는 무엇이든 사심없이 열심히 했던 아이였어..’ 라고 뇌리를 스치는 상실감도 잠시, 우울감 따위 알 리 없는 일거리가 쏟아 집니다. 신체가 늙어지기 전에는 그저 일거리가 아닌, 나를 기꺼이 쏟아 넣던 무엇이었는데.
뚜둑 거리는 무릎을 부여 잡고, 오늘따라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절규하듯 일거리를 해치우는데, 빼꼼 문이 열리며 첫째가 들어옵니다. 오늘은 함께 집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잔뜩이라고,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 봅니다. 그 얼굴이 유난히 빈짝였던 건, 오늘 내 몸이 유난히 아팠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유난히 오늘의 일상이 권태로웠기 때문일 테지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시간, 쉴 새 없이 떠드는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말해 줍니다. ‘오늘 너와의 시간이 제일 좋았어.‘
바흐 ’당신의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BWV.106
죄르지 & 마르타 쿠르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