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부산스럽습니다. 둘째가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어떻게든 직장을 빠져나와 졸업식에 참여해야 겠다며 의지를 다지고, 둘째는 어제 하루종일 연습한 행사 순서를 외워 보느라 머리가 아픕니다. 드디어, 아이를 유치원 입구에서 마중하고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갑니다. 급하게 달려온 아내는, 달려서인지, 아이의 졸업이 벅차서인지, 얼굴이 벌써 달아 올랐습니다.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문득, 둘째놈이 처음 유치원에 가던 날이 떠오릅니다. 그 날이 유독 기억 속에 박혀 있는 것은, 입구에 서서 저와 선생님을 한 시간도 넘게 난처하게 만든 그 놈의 울음 때문입니다. 유난히 두려움 많던 내 어린 날이 반복된 것만 같았던 그 날, 그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인해, 둘째가 아직은 너무 어리구나, 그럼에도 나의 사정으로 아이를 힘겹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도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며 목이 멘 아내가 내민 사진 속의 둘째는, 낯설 만큼 ’아기‘였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 들어오고, 하나 하나 얼굴을 확인하는데, 과연 놀랍습니다. 모두들, 입학할 즈음에 보던 앳된 모습이 빠져나가고 그 흔적만 남은, 어엿한 ‘소녀‘와 ’소년‘의 모습입니다. 나의 아이는 매일의 모습이 지난 그것을 매번 덮어 버려, 얼마나 훌쩍 자랐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겁니다. 유치원 문 앞에 서서 울어 대며 아비, 어미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아이는 어느새, ’우리 친구들‘이라며 친구들의 손을 잡고, 선생님의 말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억하며, 혼자 씩씩하게 가방을 둘러 메고 유치원에 뛰어 들어 가는 ’소년‘이 되었던 겁니다.
나의 아이는, 그리고 아이의 친구들은, 도약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도약‘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참으로 벅찬 경험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비 노릇을 했구나, 같은 뿌듯함과는 다른 어떤 충만함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매 순간 퇴행해 가는 존재가, 존재의 음울한 골방을 빠져 나와, 끝 없이 뻗어 나갈 것 같은 ’아이‘의 비상을 목도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소멸할 늙은 존재가, 영원을 향해 비상하는 아이의 세계를 맞이하는,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오늘도 나를, 구원합니다.
아이가 고맙다며 우릴 보며 노래하지만, 고마운 건 나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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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은, 날아가기 위해 뛰어 오르는 나의 아이를 위한 곡입니다.
두번째 악장의 어느 지점, 살며시 몇 걸음 걸은 후 도약하는 그 순간을 참 좋아 합니다. 폴 루이스는 도약 직전의 주저함마저 사랑스럽게 표현하여 마음을 찌릅니다.
나의 아이가, 모든 아이들이, 날아 올라 영원 속을 유영하길 바래봅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 2악장, 폴 루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