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세속적입니다.
하는 일이 잘 안되는지, 요즘 들어 부쩍 우울해 하던 아내가, 기어코 오늘은 울음을 터뜨리며 길게 하소연을 합니다. 나도 비슷한 사정이란 걸 아는 그녀는, 왜 자기만 이렇게 속상해 하느냐고 원망스런 한 숨을 섞습니다.
그녀는 마음 쓰는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하나 둘씩 가져 와 어느 새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 두 어마리에서 어항 3개까지 채워 버린 구피들, 아이들이 키우겠다고 들여 왔으나 관심에서 멀어져 버린 사슴 벌레들, 아이들과 나에게 입히겠다고 하나 둘 씩 구해온 옷가지들까지, 집에 오면 돌보고 메만져야 할 것들이 가득입니다. 거기에, 하는 일에 대한 기대도 높아 만족하지 못하면 쉽게 마음을 다치곤 합니다. 그녀에 비한다면, 나는 필요한 곳의 청소 정도를 제외하면, 집을 돌보거나, 심지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열성적이지 않으니, 그녀가 보기엔 늘 심드렁해 보여 답답한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세상에 심드렁해 진 것은, 부모님들의 모진 기대를 벗어나려 애쓰던 중 세상 뒤의 세상에 매혹된 그 날부터였던 거 같습니다. 그 때부터, 나를 세상에 붙들어 메던 인연들을, 마음 속에서 하나, 둘씩 내치면서 스스로 외로워 졌습니다. 짐은 점점 간소해 졌고, 가지고 싶은 것도 사라져 갔습니다. 음반 몇 장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도 집 안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생각나질 않으니, 내가 세상과 가깝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반면, 그녀는 사랑하는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나를,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면 누구보다 눈을 반짝이며 듣고, 영화의 슬픈 장면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많으니, 세상이 그녀를 놓지 않는 거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 세속적입니다.
오늘 밤, 그녀가 회색빛 내 머리를 염색해 주는 동안, 그녀를 위해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를 오디오에 올립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수많은 음악들을 만들어 온 하이든에게 세계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속해 있는 곳이기에 결코 경멸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세속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세속적입니다.
그의 음악도, 그녀도, 세속적이어서 아름답습니다.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Hob.48, 1악장, 글렌 굴드
새벽에 일어나 차분한 마음으로 듣는 음악은 참 좋네요. 쓰린 속때문에 일찍 일어났는데 금새 속을 달래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