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리듯, 며칠 전부터 보일러가 ‘쿵쿵’ 대포를 쏘아 대더니, 마침내 오늘부터 불 붙이기를 그만 두고 에러 코드만 뱉어 냅니다. 혼자라면야 며칠 꽁꽁 싸매고 지낸다고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특히 춥다고 오두방정을 떨 두 사내놈들을 생각하면 오늘 고쳐야 할텐데 큰일입니다.
급하게 수리를 부탁하러 전화를 거니, 기사분께서 일정을 확인하셔야 한다고, 오늘은 힘들 수도 있다는 불안한 소식을 전합니다. 저녁 때가 되고, 찬 물에 쌀 씻다가 속으로 욕하며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데 마침 연락이 옵니다.
“기사님, 늦은 시간에 무리한 부탁인줄 압니다만, 혹시 오늘 수리가 가능할까요? 죄송합니다.”
“아, 오늘 일정이 끝났는데.. 뭐, 근처니까 지금 가겠습니다. 겨울인데 내일까지 힘드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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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신성함, 직업 정신, 배려, 함께 살아가기... 한 시대가 고언을 고하며 동시에, 사라져 가는 어떤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이라 믿고, 부족하고 미약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았던 우리의 시대가 황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와 이웃들의 선함이, 이젠 드물어 모두 어둠 속으로 사그라져 가는 요즘, 간혹 만나는 그들은 유난히 빛납니다. 사그라 들기전 마지막 빛이기 때문일까요.
모든 시대는 결국 그 끝을 맞이합니다. 그건 ‘신’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바그너의 ‘반지’ 속 신들처럼, 쇠락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신 답지 않은 비열함으로 결국 반지를 되찾지만, 결국 그들의 땅에 황혼이 내리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우리 곁에도,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선’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가 그들의 시대를 직조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들의 등을 밟고 우리의 시대를 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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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가 다시 생명을 이어갑니다. 방은 따듯하고 물은 뜨겁습니다.
보일러 기사분께, 그리고 곁에 있는 ‘우리 시대’의 동지들에게 감사한 밤입니다.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지그프리트의 장송 음악’
한스 크나퍼츠부쉬, 빈 필하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