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부임하는 학교에 왔다가 교장선생님이 아직 출근하지 않으셔서 기다릴 겸 학교 밖으로 걸어 나와 밥 먹을 곳을 찾다 못 찾고 예쁜 카페로 들어왔다. 전망이랄 게 없이 통창으로는 아파트밖에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장소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연한 설렘이 느껴졌다. 낯선 장소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오래된 미래. 읽다 보니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들인 것 같아 블로그를 찾아보니 작년에 읽고 리뷰를 유튜브에까지 남겼었다. 리뷰를 읽어보니 내용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 이제 새롭지도 않다.
구석 자리에 앉은 나는 처음 만난 아기 엄마 둘이 바로 친구가 되어 자신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몇 개월이에요, 어린이집 보냈더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니 아이 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또래인가 보다. 아이만으로 바로 대화를 트는 그들의 친밀감이 귀여웠다. 이 동네는 새로 아파트가 생기고 한창 입주 중이라 젊은 엄마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조금 있으니 아이 한 명이 울었다. 젊은 엄마는 당황해 아이 옷을 입히며 연신 “얼른 옷 입고 나가자”를 외쳤다. 얼마나 진땀 났을까? 오래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나도 겪은 일이다. 아이가 많은 동네. 활기찰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피천득 님의 시집을 펼쳤다.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시집 코너에 갔다가 이 책을 빌려 왔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시집을 가끔 읽는다. 피천득 님은 학창시절 수필로 만났다. 몇 년 전에도 수필집을 읽으며 참 멋지게 사셨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에도 음악을 사랑하고 자녀를 아끼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의 음악 사랑을 물려받은 손자(스테판 재키브)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총 11 개의 큰 주제로 묶인 이 시집에는 다양한 시들이 실려 있다. 가족애, 자연, 인간 관계에 대한 시도 있지만 해방의 기쁨이나 안중근 의사를 추억하는 시대를 반영한 시도 있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아가의 오는 길’의 대목대목을 외던 생각이 난다. 교과서에 나왔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보니 반가워 공책에 옮겼다. 카페에서 아기를 보며 ‘아가의 오는 길’을 읽으니 느낌이 바로 와닿았다. 회갑 지난 제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찡했다. 지금은 그의 제자들 중에도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세월의 무상함과 남은 글의 고귀함을 느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듣고 있는 음악과 지금 읽고 있는 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 순간’이라는 시를 읽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음악을 좋아해서인지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시는 ‘제2악장’이다. 그가 좋아한다는 곡들의 2악장을 쏙쏙 골라 다시 들어보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고음의 화려함보다 저음이나 중음의 중후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그는 비올라의 알토 음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아직은 고음이 좋은 나도 더 나이가 들면 바뀌게 될지 궁금하다. 글을 마치려는 지금(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차이코프스키 현악 4중주 1번 제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가 우아하고 숭고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 목소리 리뷰